# VOL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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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영

어린애 소꿉놀이

 

인용

그 사람들은 모두 목소리를 낮추고 발소리를 죽인 채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는데 히로스케가 보기에는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태도였습니다. 여태 잔뜩 점잔을 빼는 듯하던 이 세상이 하잘 것 없는 어린애 소꿉놀이 같은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죠. 자기만 아주 대단한 것 같고 다른 고모다 집안의 사람들은 벌레처럼 하찮고 조그맣게 여겨졌습니다. ‘뭐야, 이런 건가?’ 그건 차라리 실망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역사에 남은 영웅이나 엄청난 범죄자들이 품었던 우쭐한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ER02-402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대목인데 이 문단이 새벽 5시쯤부터 오전 9시까지 네 시간이 걸렸다. 

권일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인용

사람들은 넋을 잃고 파랗게 질린 얼굴을 마주볼 수밖에 없었다. 그 기사에는 뭐랄까, 광기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다른 세상에서나 볼 듯한 불길한 환영으로 뒤덮인 내용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 지옥 밑바닥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 인간 세계가 아니라 악마의 세계에서 날아온 소식이었다.

- 10-465, ER

 

가장 싫어하는 형식이다. 그나마 열심히 손질...

권일영

관능소설 신간 소개 컬럼

여러 매체(스포츠신문, 석간신문, 엔터테인먼트 잡지 등)에 신간 소개 컬럼을 쓰면서 느끼는 점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용

 

출판 코드나 편집부 방침에 따라 매체마다 관능 장면을 인용할 때는 고등학생 이하 미소녀가 주인공인 것은 피하고 싶다, 하드한 SM은 환영하지 않는다, 스카톨로지는 피하고 싶다는 암묵적인 요구을 느끼게 되는 매체도 있다. 자기 규제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마니아적인 찐한 소설은 자기 독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리라. 따라서 관능소설 신간 모두를 소개 대상으로 할 수 없는 사정도 있는데 요즘은 마니아와 독자층의 경계가 옅어졌다. 예를 들어 SM 같은 경우는 작품에 따라 여성 독자들도 애독하는 상황이 되었다. 

- 2008년 가을 (Ka)

 

 

권일영

속문학이 번성하다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한다. 소설, 즉 속문학 장르가 번성하기 시작한 때는 원나라 이후. 

 

인용

 

아득한 고대로부터 근세 전기라고 하는 송(宋)나라 때까지 중국 문학의 주류를 차지한 것은 정통적인 시문(詩文) 장르였다. 몽골 왕조인 원(元)나라 이후 이런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 희곡이나 소설 같은 이른바 ‘속문학(俗文學)’ 장르가 점차 번성하게 된다. 즉, 원나라 때는 ‘원곡(元曲)’이라고 불리는 희곡 장르가,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는 단편, 장편을 가리지 않고 소설 장르가 크게 발전하고 성숙했다. 원곡은 ‘백화(白話)’로 쓰였는데 명나라와 청나라 때 소설에는 ‘문언소설(文言小說)’과 ‘백화소설’이 공존한다.물론 중국 소설 역사의 흐름을 보면 역시 이 시기에 이르러 급성장한 백화소설 장르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 머리말, ⅰ쪽

 

 

 

권일영

19세기 말 일본 사람들의 '러브'

검증하지 않은 대목이지만, 거칠게 옮기면 이렇다.

19세기 말에 서양에서 대량으로 수입된 물건과 말, 관념은 일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때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기타무라 도코쿠*라는 청년이 만진 '얼음'**은 'Love'였습니다.

물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성욕'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서양식으로 독립적인 남녀의(그게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Love'라는 개념을 일본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또 같은 'Love'라는 말은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그들(일본인들)은 하느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전자에는 '연애(戀愛)'라는 역어를, 후자에는 그냥 '애(愛)'라는 역어를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들은 몰랐습니다.

(중략)

그래서 도코쿠를 비롯한 그룹은 당시 최신 유행 가운데 하나였던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으며, 또 유행어 가운데 하나였던 '연애'라는 말을 '경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작하려는 '문학' 속에 그 가장 새로운 관념을 도입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전 시대로부터 이어받은 말은 매우 수식적이라 그들이 원하던 세계를 표현하기는 어려웠던 겁니다.

- '프롤로그'에서

  • * 나쓰메 소세키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얼음' : 《백년의 고독》에 나오는 마콘도 주민들이 처음 만진 '얼음'에 비유.